하동서 1927년 제2의 3·1운동 주도한 독립운동가 46명 서훈 신청

하동군·경남독립운동연구소, 46명 수형기록·독립운동가 문건 공개

2019-01-02<수>OBNTV열린방송 보도국



올해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인데요.

하동군과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1927년 3월 경남 하동 장날에 제2의 3.1 운동이 일어난 사실을 확인하고
관련 독립운동가 46명의 수형기록을 3.1운동 100년만에 발굴해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습니다.


이번 서훈 신청에는 제2의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강대용(姜大榕·하동군 악양면)·여국엽(余國燁·악양면)·여태원(余太元·악양면) 선생 등 13명과

3남매 독립운동가 조복애(趙福愛·옥종면),

대를 이은 한집안 세 식구 독립운동가 박성무(朴性茂·적량면),

옥중 순국한 정석용·이형석·이기호 선생,

호남출신 최백근(광양시)·김용상(정읍시)이 포함됐습니다.

▲ 정재상 소장은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형사공소사건부’·‘집행원부’·‘일제감시카드’·‘경남도 보고서’ 등의 자료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927년 하동에서의 제23·1독립운동을 주동한 13명의 수형기록과 여성독립운동가 조복애 선생을 포함, 한집안 세 식구 독립운동가 등 46명의 항일행적이 담긴 수형문건을 찾았다”고 밝혔다.


[정재상 소장/경남독립운동연구소]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형사공소사건부’·‘집행원부’·‘일제감시카드’·‘경남도 보고서’ 등의 자료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927년 하동에서의 제2의 3·1독립운동을 주동한 13명의 수형기록과

여성독립운동가 조복애 선생을 포함, 한집안 세 식구 독립운동가 등

46명의 항일행적이 담긴 수형문건을 찾았습니다"


▲  윤상기 군수와 정재상 소장이 서훈신청에 앞서 공적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윤상기 하동군수는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가의 행적이 긴 어둠을 털고 세상의 빛과 보게 돼 뜻깊다”며 “늦었지만 선열들의 큰 발자취를 통해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계기로 삼아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독립운동가 발굴은

지난해 3월 윤상기 군수와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군내 미발굴·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를

2년간 추진키로 함에 따라 지난해 1차 발굴자 25명의 서훈신청에 이어

이번에 2차 발굴자 46명의 서훈신청이 이뤄졌습니다.
 

한편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그동안 국내외 독립투사 천여명을 발굴해
160여명이 정부 포상과 함께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나라를 되찾으려던 선조들의 숭고한 뜻이 그들을 기억하려는 후손들의 노력으로
하나 둘 다시 빛을 되찾고 있습니다.

(하동=송철수 기자)

1927년 하동서 제23·1운동 거사


이번에 발굴한 문건 중에 1927년 하동에서 제23·1운동이 일어났음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대구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형사공소사건부’(1927, 강대용·임성필·여국엽 선생 등 13명과 관련한 인적사항 및 형량이 적시돼 있다.)

악양면 출신 강대용·여국엽·임성필·여태원·송우복 선생 등 20여명이 192612월 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 선생의 집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규탄하는 시위를 모의했다.

 

 강대용(당시 41)·여국엽(36) 선생은 1927년 하동·광양지역 등 뜻있는 인사 100여명에게 비밀리에 연락, 하동장날을 기해 대규모 일제 규탄 시위를 하기로 했다.

 

대구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형사공소사건부’(1927, 강대용·임성필·여국엽 선생 등 13명과 관련한 인적사항 및 형량이 적시돼 있다.)


선생은 같은 면 중대마을 임성필(47)·노종현(30)·이시용(30)·여성원(27)·여태원(24)을 규탄시위 총 연락책으로, 정동마을 송우복(42)·조한식(39), 동매마을 김수룡(29)·강상용(23) 등을 중심으로 빈틈없는 거사 준비를 진행했다.


또 선생은 하동·적량·고전 지역은, 하동읍 두곡리 거주 김삼륜(32)을 총책으로 했다. 그리고 인근 전남 광양지역은 진상면 섬거 출신으로 악양면 정서에 거주한 김무일(22)을 연락책으로 했다. 거사일은 하동장날인 33일로 정했다.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지역인사는 광양군의 골약면·다압면·진월면·진상면의 김태수(30)·최한원(23)·최영근(22)을 포함, 300여명에 달했다. 시위는 인근 주민과 상인 장꾼 500여명도 가세했다. 시위대는 점차 늘어나 1000여명에 달했다.

 

 강대용·여국엽 선생은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하동경찰서와 군청을 향해 거친 행진을 하면서 “조선민족 억압하는 모든 법령을 철폐하라, 일본인의 조선이민을 반대한다, 경작권 확립을 보장하라, 부당한 납세를 반대한다, 모든 학교 교육은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일제를 규탄했다.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자 다급해진 일본경찰은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일본경찰과 충돌, 진압 경찰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같은 일로 강대용·여국엽·여태원·임성필·송우복 선생 등 중심인물 50여명이 일본경찰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30여명이 재판에 넘겨져 주동자 강대용·여국엽 선생 등 13명은 진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騷擾)·상해(傷害) 등의 죄목으로 형이 확정될 때까지 징역 2년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3남매가 독립운동에 가담


조복애 선생(서대문 형무소에서 촬영, 1942, 일제감시 인물카드)


3남매가 독립운동에 가담한 조복애(趙福愛·1918~?·女·옥종면) 선생은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조정래(건국훈장)의 여동생이며 독립운동가 조옥래의 누나이다.

 

선생은 1942년 숙명여자전문학교(지금의 숙명여자대학교) 재학 중 일제의 한반도 침탈정책을 비판하며 조국독립에 앞장섰다. 이같은 일로 1942년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동생 조옥래(趙玉來·1922~?) 선생은 1941년 일본으로 유학해 박응포·신기중 등과 함께 조국독립을 위해 조선청년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로 인해 19422월 일본에서 검거돼 19434월 일본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을 때까지 1년여 간 옥고를 치렀다.  

 

◇ 한집안 세 식구와 호남출신 독립운동가의 활약


▲ 박성무 선생 등 판결문(1934, 전주지방법원)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가담한 박성무 선생은 하동지역 3·1만세운동 지도자 박치화(건국훈장)의 아들이며 독립운동가 박문화(대통령 표창)의 조카이다. 한집안 세 식구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선생은 19313월 진주공립고등학교 4학년 재학 중 수업료 철폐를 위한 동맹휴교를 선동한 혐의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고향 하동으로 돌아와 하동청년동맹에서 활동하면서 그곳에서 간부로 활동 중이던 신만중(건국훈장‧적량면) 선생을 만나면서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투신했다.

 

하지만 하동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박성무 선생은 19334월 그의 숙부 박문화가 살고 있던 전북 정읍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그곳에서 정읍공립농업학교 학생 최종엽(임실)·최봉한(군산)·김민옥(정읍)·최대열(부안)·이병국(창원)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던 중 19335월 위 동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돼 193491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 형을 받을 때까지 4개월 여간 옥고를 치렀다.

 

◇ 옥중 순국한 정석용·이형석·이기호 선생


▲ 이형석·정석용·이기호 선생 관련 경상남도 보고서(1952, 3·1운동 당시 순국한 피살자 명부)

하동군 고전면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정석용(고전면)·이향석(고전면)·이기호(양보면) 선생은 19194월 고전면 주교(배다리) 만세운동에 가담한 인물이다.


 

세 선생은 고전면 출신 박영묵·이종인·정상정·정재기 등 33인과 일신단을 조직하고 46일 주교리 장터에서 1000여 명의 장꾼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이같은 일로 세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모두 순국했다. 이같은 사실은 1952년 경남도가 작성해 내무부에 올린 ‘3·1독립운동 당시 일본인으로부터 피살당한 애국자 명부’에서 확인됐다.



◇ 서훈신청자 인적사항 및 공적요지

▲강대용(姜大榕1886~1958‧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413)

소요 등의 죄목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미결구류 통산 240일의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명순(姜明順1904~?‧하동군 하동면 읍내동)

선생은 1928년 경남 통영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주도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요 및 건조물 손괴 등의 죄목으로 마산법원에서 징역 3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상용(姜相用1904~?‧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권대섭(權大燮1896~1982‧하동군 청암면 궁항리) 선생은 1919년 청암면 궁항리에서 정남시 등과 인근 주민 300여명을 규합하여 하동군 옥종면 안계 장터로 진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금궁병기(宮炳基1920~?‧하동군 적량면 관리 557) 선생은 1944년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고 선전물을 제작 배포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및 언론 출판‧집회‧결사 등 임시 취체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무일(金武一1905~?‧본적/광양군 진상면 섬거리 /주소/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삼륜(金三倫1895~?‧하동군 하동면 두곡리) 강대용과 활동사항 같음. 형이 확정될 때 까지 1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수룡(金水龍1903~?‧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승탁(金承鐸1899~?‧본적/ 하동군 적량면 서리/주소/하동군 횡천면 여동리) 선생은 1920년 하동에서 신기중 선생 등과 함께 일제의 한반도 강탈 정책을 비판하는 활동을 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대정8년 제령7호 위반의 죄목으로 1920122일 진주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대구복심법원에 항고했다. 하지만 항고 기각으로 옥고를 치렀다.

▲김완돈(金完惇1904~?‧본적/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주소/구례군 간문면 운천리) 선생은 1935년 영‧호남 일대에서 일제의 강탈정책을 규탄하는 시위와 독립운동가를 숨겨준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과 범인장닉 등의 죄목으로 1935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미결 통산 581일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주석(金周錫1896~?‧승려‧하동군 화개면 정금리) 승려 김주석 선생은 191946일 정상근 양봉원 등 300여명과 함께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31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승려 김주석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진주 감옥에서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태수(金泰守1898~?‧본적/하동군 하동면 읍내리/주소/광양군 골약면 태인리)

선생은 1927년 최한원 최영근 등과 함께 조선어로 된 문서에 일제의 불법 감금 폐지와 조선어 사용 확립 등의 내용을 담은 문서를 광양군 일대에 배포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김태순(金兌淳1904~?‧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708) 선생은 1928년 조선청년동맹원으로 출판‧집회‧결사 자유의 건 등 일본의 강탈정책을 비방하고 선전물을 제작‧배포한 혐의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4개월 형을 받았다. 선생은 또다시 1935년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서다 일제에 체포돼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남경봉(南景峰1880~?‧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선생은 1920년 경남 일대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대정8년 제령7호 위반의 죄목으로 192118일 마산 충무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노종현(宗鉉1897~?‧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박만홍(朴晩鴻1890~?‧하동군 양보면) 선생은 1920년 충청도 공주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보안법 위반‧출판법 위반 ‧ 대정8년 제령7호 위반 ‧ 정치처벌법 위반으로 대전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성무(朴性茂1908~?‧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938) 본문 기사 참조

▲송우복(宋又福1885~?‧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강대용과 활동사항 같음. 형이 확정될 때 까지 1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신기중(愼驥重1901~?‧하동군 적량면 고절리) 김승탁과 내용 같음. 

▲양봉원(奉源1900?‧승려‧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쌍계사 승가대학 학생) 쌍계사 승가대학 학생으로 김주석과 내용 같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여국엽(余國燁1892~1978‧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59)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여성원(余成元泰玉1899~?‧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여태원(余太元宗守1903~1966‧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747)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1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오재원(吳在元1889~?‧본적/경주군 산내면 내칠리/주소/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선생은 1939년 경남 부산 경북 일대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고 민족해방운동을 펼쳤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부산법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선생은 1942년 또 다시 항일운동을 펼치다 체포돼 징역 2년 미결구류 통산 150일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윤경삼(尹京三1882~?‧본적/하동군 하동면 읍내리/ 주소/광주군 송정면 송정리) 선생은 1926년 전남 ‧ 경남 일대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광주법원에서 소위 소요 상해 등의 죄목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형을 받았다.

▲이기호(琦鎬1888~1919‧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선생은 191946일 박영목 이종인 정상정 등과 독립운동 단체인 일신단 조직을 주도하고 고전면 주교(배다리)장터에서 1천여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이시용(時用1897~1958‧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618) 강대용과 활동사항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용두(容杜1905~?‧하동군 화개면 삼신리 580) 선생은 1927년 하동농업보습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는 동맹휴교를 주도하다 2학년 때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1928년 하동에서 일제를 비방하는 내용을 담은 만화와 한글을 사용해 야학회장 벽면에 첨부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1929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이원태(源泰1894~?‧하동군 남면 덕천) 선생은 1919329일 진교 장날을 이용해 정재백 이홍식 등 1000여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512일 진주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형석(享石亨石1880~?‧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이기호와 내용 같음.

▲임성필(聖必聖範1880~?‧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석용(鄭錫鎔1878~1919‧하동군 고전면 범아리) 이기호와 내용 같음.

▲정희근(鄭禧根1888~?‧하동군 금양면 대치리 139) 선생은 1919년 박치화(건국훈장) 등과 대한독립선언서 일명 하동 독립선언서를 제작 서명한 12인 중 한명이다. 선생은 320일 남해장터에서 이범호 등과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태 90도 형을 받았으나 항고하여 2개월 만에 석방됐다. 하지만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평생을 고생하다 생을 마쳤다.

▲조복애(趙福愛1918~?‧女‧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77) 본문 기사 내용과 같음

▲조옥래(趙玉來1922~?‧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77) 본문 기사 내용과 같음.

▲조용환(鎔煥1909~?‧하동군 적량면 동리 965) 선생은 1937년 전남‧경남 일대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광주법원에서 소위 국가보안법 위반 ‧ 특별 조치령 위반으로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조한식(趙漢植1889~1963‧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828)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최백근(崔百根1913~?‧본적/광양군 골약면 태인리) /주소/하동군 하동면 읍내동) 선생은 1931년 일제의 조선 침탈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하동군내에 배포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진주법원에서 금고 6개월 형을 받았다.

 ▲최영근(崔永根1906~?‧본적/하동군 하동면 읍내리 /주소/광양군 골약면 태인리) 김태수와 내용 같음. ▲최한원(崔漢元1905~?‧본적/하동군 하동면 읍내리 /주소/광양군 골약면 태인리) 김태수와 내용 같음.


◇ 박성무와 함께 호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하동출신 박성무 선생과 함께 활동한 

▲이병국(柄國1911~?‧경남 창원군  웅동면 마천리 94) 선생은 19334월 중순 전북 정읍공립농업학교 3학년 재학 중 박성무의 지도를 받으며 최봉한(대통령 표창) 최대열 김민옥 최종엽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고 적색노동조합에 적극 참여하는 등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섰다. 이 같은 일로 19345월 일본경찰에 체포돼 9월 중순 전주법원에서 징역 16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받을 때 까지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최대열(崔大烈‧1913~?‧전북 부안군 백산면 금판리 568)

▲김민옥(金玟玉1912~?‧전북 정읍군 덕천면 달천리 596).

▲최종엽(崔宗燁1910~?‧전북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90) 각각 징역 16월에 집행유예 3년 형을 받을 때 까지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용상(金容相1914~?‧전북 정읍군 정주읍 시기리 306) 선생은 정읍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후 1932년 김한섭 등과 정읍에서 비밀결사 노동조합을 조직,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섰다. 이 같은 일로 19345월 일본경찰에 체포돼 9월 중순 전주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형을 받을 때 까지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한섭(金漢燮1913~?‧전북 정읍군 정주읍 연지리 208) 김상용과 활동사항 같음.(이상 46)


참고

독립유공자 유족 연락처

1. 여국엽 선생 후손

  - 여상규(관계: 조카)

             (직업: 국회의원, 법제사법위원장, 사천‧남해‧하동)

             (연락처: 국회사무실: 02-784-1845

                      위원장실:  02-784-1354

                      휴대폰:    010-5201-0593

2. 강대용 선생 후손

   - 강동제(관계: 손자)

             (직업: 농림부 국장)

             (연락처: 서울 용산구  

                전화 010-8770-8598)

  - 강인철(관계: 증손자)

             (직업: 검사)

                   사법연수원 18

                   법무부, 재경부

                   천안지청장

                   순천지청장  

                   변호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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